조선의 역관들은 외국의 이질적인 사회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장점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뉴프런티어들이었다. 그들은 당대에 고답적인 소중화주의 논리에 갇혀 있던 양반들과 달리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외교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숱한 성공을 거두었다.
신분상 중인이었던 조선의 역관들 중에는 종계변무나 국경 분쟁 같은 국가의 주요 현안을 해결한 협상가도 있었고, 중국과 일본의 일급 기밀을 탐지하거나 최첨단 과학 정보를 입수한 스파이도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뛰어난 시재와 예술혼을 떨친 문인도 있었고, 주어진 무역 특권을 이용하여 축재에 성공한 부자도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은 이들 역관들을 끊임없이 차별하고 이용했으며 틈만 나면 정쟁의 희생물로 삼았다. 특히 환국 정치가 극심했던 숙종대에는 서인과 남인을 후원했던 역관 가문이 번갈아 피바람을 맞았다.
그렇듯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오랫동안 설움을 곱씹던 역관들은 임진왜란 이후 조직적으로 중인들의 신분 상승을 선도했고, 일부는 평등과 구원을 내세운 천주교 신앙에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조선이 누란의 위기에 빠졌던 19세기 말 제일 먼저 개화를 충동하는 선각자로서 활동한 계층이 바로 그들이었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은 전쟁과 독재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바로 지금이 과거 주변국을 상대로 종횡무진했던 조선의 외교 전문가, 무역 전문가, 외국어 전문가 역관들의 지혜를 되새겨야 할 때다.
이상각/작가, 역사저술가. 소설, 동화, 자기계발, 인문, 항공, 한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저서 및 편역서로 《악동시대》, 《성채》, 《가르랑말 으르렁말》, 《모쿠소관 전기》, 《삼십육계-성공의 법칙》, 《전국책 화술책》, 《마음을 열어주는 명심보감 이야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조선팔천》, 《조선노비열전》, 《나도 조선의 백성이라고》, 《효명세자》, 《이산 정조대왕》,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중국여자전》, 《조선 정벌》, 《조선 침공》,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진도 씻김굿 이야기-이슬 털고 가야지》, 《중국사돋보기-아편전쟁》, 《중국사돋보기-태평천국》, 《중국사돋보기-신해혁명》, 《대한민국 항공사-조국의 하늘을 꿈꾸다》, 《대한민국 항공사-태극날개를 펼치다》, 《우리나라 항공인 열전-저 푸른 하늘에 새긴 이름》, 《안흥량 난행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