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뒤 서구열강의 노골적인 침탈에 신음하던 청나라는 대내외적인 혼란을 틈타 창궐한 태평천국으로 인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내부동력을 소진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오늘날 태평천국의 난은 의화단 운동, 신해혁명으로 이어진 중국혁명사의 중요한 기점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냉정한 시각으로 본다면 태평천국의 난은 혹세무민으로 일관했던 전형적인 사교집단의 망동으로서 중국이 서구열강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광동성의 낙방거사였던 홍수전은 빈약한 기독교 신앙과 자신의 환몽을 얼버무려 사이비 종교단체 배상제회를 설립한 다음 멸만흥한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와 싸우며 14년 동안 태평천국 천조정권을 이끌었다. 성서를 동양적으로 해석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고통 받는 민중의 염원과 절망을 안고 대성공한 듯 보였지만 신의 사랑은 생각보다 짧았다.
태평천국이 멸망한 뒤 사가들은 홍수전을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자 반란군의 괴수로 취급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들의 쓸모에 맞게 가공된다. 태평천국도 마찬가지다.
신해혁명 으로 청조를 무너뜨린 손문과 그의 계승자들은 홍수전을 만주족과 청나라에 저항한 혁명의 선구자로 칭송했다. 그들의 시각에는 전제왕조인 청나라보다 순진한 농민을 미혹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태평천국이 좀더 나아보였던 모양이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도 홍수전을 영웅시했다. 그들에게 있어 홍수전은 '평등사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농민혁명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서구에서 진리를 구한 선구자’였다. 실로 광기에 사로잡힌 정치와 종교의 어처구니없는 앙상블이었다.
우리가 통상 정상이라고 여기는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예배 양식, 교의, 경전을 바탕으로 이타적인 사랑이나 범죄에 대한 징벌, 나눔의 실천 등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인 건전한 도덕률을 지향한다. 그들은 대부분 나름의 종말론을 갖고 있지만 현실 부정보다는 행복한 내세를 보장하면서 현실의 건전한 생활양식을 권장한다.
이에 비해 사이비 종교는 극적인 치유나 허무맹랑한 예언을 앞세우면서 교묘한 논리로 신세계를 노래한다. 일방적인 구원의 길을 내세우고 신도들을 현혹하면서 배타적인 인간관계를 조장한다. 신도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교주의 지시에 따라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단계를 뛰어넘어 정상적인 국가 체계의 붕괴를 초래하기도 한다. 중국 근대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태평천국이 그랬다. 태평천국은 무지와 광신에서 비롯된 혁명의 허상이 한 나라의 현실과 미래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상각/작가, 역사저술가. 소설, 동화, 자기계발, 인문, 항공, 한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저서 및 편역서로 《악동시대》, 《성채》, 《모쿠소관 전기》, 《삼십육계-성공의 법칙》, 《전국책 화술책》, 《마음을 열어주는 명심보감 이야기》, 《고려사》, 《조선 왕조실록》, 《조선팔천》, 《조선 정벌》, 《조선 침공》, 《나도 조선의 백성이라고》, 《효명세자》, 《이산 정조대왕》,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대한민국항공사》, 《중국여자전》, 《중국사돋보기-아편전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