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여명이 한반도를 비추던 19세기 후반, 수많은 벽안의 이방인들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진 조선을 찾아왔다. 선교사와 상인, 군인, 여행가, 정치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 그들은 이 땅에서 저마다의 뜨거운 삶을 일구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일확천금의 꿈을 꾸었고, 누군가는 또 낯선 서양 문화에 얼어붙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이 책은 바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의 문호 개방과 함께 짧은 기간 동안 개화의 전 부문을 이끌었던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 한국인의 편에 서서 일제의 폭압에 맞서 싸웠던 프레드릭 맥켄지와 어네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스코필드의 활약상은 우정과 연민이란 측면에서 매우 감동적이다. 반대로 자국의 이기적인 시선으로 한국의 비극을 지켜보았던 이폴리트 프랑댕, 카를 베베르, 조선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중립화를 주장했던 윌리엄 샌즈 같은 외교관도 있다.
순수하게 한국의 자연과 문화, 인간을 사랑하고 염려했던 이사벨라 비숍, 퍼시벌 로웰 같은 학자들, 또 한국인의 모든 것을 아끼고 그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낸 화가 새비지 랜도어, 엘리자베스 키스, 릴리안 밀러의 작품은 우리에게 안타깝고 정겨운 그때의 흔적을 되새기게 해준다.
한국 최초의 영어교사 토마스 핼리팩스나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 제중원의 설립자이며 미국영사로 활약한 호레이스 알렌과 세브란스병원 설립자 올리버 에비슨의 행적은 우리나라 근대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 땅의 여성과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한 로제타 홀의 뜨거운 사랑도 있다.
한편 개항 이전 도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통상을 요구했던 에른스트 오페르트, 불확실한 자료를 이용하여 한국 전문가 행세를 했던 윌리엄 그리피스, 일제의 주구가 되어 한국인을 모욕했던 통감부 고문 더럼 스티븐스와 같은 인물도 빠뜨릴 수 없다.
한국인들의 처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비정한 심장으로 일본의 한국 병탄을 승인했던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실무자 윌리엄 태프트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감내해야 할 진실이다.
백여 년 전 조선의 망국기에 이 땅을 지나간 벽안의 이방인들의 자취를 복기하다 보면 여러분들은 한 시대를 휩쓸었던 제국주의자들의 광기와 인간적인 지식인의 비애를 발견하고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행적을 감정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안팎에서 바라보았던 당시의 한국과 한국인의 흔적을 반추하고 그때와 별다르지 않은 현실을 통찰함으로써 무기력했던 과거를 미래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옛 질서는 새 질서에 자리를 물려주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헤어진 동포를 껴안아야 하고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땀 흘려 가꾸어야 할 이 나라는 아직도 피어린 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각/
작가, 역사저술가. 소설, 동화, 자기계발, 인문, 항공, 한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저서 및 편역서로 <악동시대>, <성채>, <모쿠소관 전기>, <삼십육계-성공의 법칙>, <전국책 화술책>, <마음을 열어주는 명심보감 이야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조선팔천>, <조선노비열전>, <나도 조선의 백성이라고>, <효명세자>, <이산 정조대왕>,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조선정벌>,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대한민국항공사> 등이 있다.